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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 1

블랑시 .

나의 수집 강박은 유치원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공룡 그림들을 모았다. 각종 잡지에서 오리고 붙이고,  공룡 대백과를 여러권 소유했다.

저장과 소유의 기분은 짜릿하고 끔찍할 정도로 중독적이었다.

그렇게 호더적 습성이 완전히 피우게 된건(full-blown) 초등학교 6학년에 와서였는데, 그 때는 홈쇼핑 카탈로그와 (보그, 엘르같은) 패션 잡지를 모으는 것을 좋아했던 것같다. 그 곳에 나와있는 모든 쓰레기같은 활자들과 덧없는 이미지들을 기억하고 아로새기고 되뇌였다. 물론 인쇄물의 냄새도 무척 좋았다. 싸구려 종이의 질감과 부피. 여러번 읽게 되면 이상하게 변형되는 잡지의 견고하지 못함 역시 나의 취향에 걸맞는 것이었다. 나는 산처럼 쌓인 잡지들과 카탈로그들을 들여다보며 뭉클한 심상에 젖곤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건대, 그 모든 수집의 기저에는 불안이 있지 않았나 싶다. 존재를 기억해줄 의사-무덤 만들기 같은 것 말이다. 거창하지도 못하고 무의미할 뿐인 돌더미 표식같은 것 말이다. 산 속에 너저분하게 쌓아져올린 돌탑들. 그것에는 소멸에 대항하는 부질없는 몸부림같은 것밖에 없다.


소멸이라 함은 존재의 소멸 뿐만 아니라 기억과 시간의 소멸까지 포함한다. 기억들은 매우 빠르게 부식되고 흩어져버리는 반면 인쇄물들은 제법 느리게 썩어간다. 더군다나 나는 그것을 만질 수 있고, 그것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감각은 안정을 가져다준다. 도저히 연관지을 수 없는 현실에 나를 붙들어매준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수집 강박의 흔적과 같은 행동들, 가령 책이나 문서나, 링크나 데이터 조가리들을 열심히 줏어다가 모으는 것은 거기에서 단 한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나? 나는 어떤 유의미한 것을 생산하고 있나? 진정 수집이라는 것이 소멸을 추동하는 시간에 대항할 수 있는 계제나 되는가? 나는 조금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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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냉  (0) 2018.05.24
탄산수  (0) 2018.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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